휴비스 20년의 역사를 돌아보다
섬유산업은 인류문명과 함께 발전해왔다. 특히 화학섬유는 19세기 이후 인류의 문명화를 이끈 핵심산업의 하나로 발전했다. 현대사회에서 화학섬유는 인류의 의생활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업분야의 발전을 촉진하는 기반 소재산업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화학섬유는 화학적인 가공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드는 섬유, 특히 유기질의 인조섬유를 가리킨다. 재생섬유(비스코스,
큐프라), 반합성섬유(아세테이트, 폴리믹스), 합성섬유(나일론, 폴리에스터, 비닐론, 아크릴) 등을 모두 포함한다.
이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합성섬유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나일론, 폴리에스터, 아크릴 등이 합성섬유의 대표적인 제품들이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물레‧베틀을 이용해 삼베, 모시, 비단, 무명 등의 천연섬유를 가내수공업 형태로 가공, 생산해
왔다. 1910년대 들어서는 면방직업과 생사 및 견방직업을 중심으로 근대적인 공장제 생산이 시작되었다.
1950년대 들어와 초보적인 형태의 화학섬유가 처음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섬유 수요가 크게 늘고 다양화함에 따라 기존 면방업체와 화학업체들이 화학섬유 분야에 앞다퉈 진출하여 산업으로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신생업체들도 속속 시장에 진입하면서 생산설비가 크게 확충되었다.
이에 힘입어 1970년대에는 화섬산업의 고도성장이 이루어졌다. 특히 1970년대 중반에는 국내 수요의 약 70%를 수입대체할 만큼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제품생산구조도 다변화하여, 나일론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폴리에스터가 새로운 주종 상품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국내 화학섬유산업이 이처럼 성장한 데에는 (주)삼양사와 SK케미칼(주)의 역할이 매우 컸다.
(주)삼양사는 1924년 10월 ‘민족경제의 자립과 성장’을 창립이념으로 내걸고 ‘삼수사(三水社)’라는 이름으로 창립하여 지금의 삼양그룹을 일으킨 기업이다. 창립 초기에는 농장 근대화, 간척사업, 염전사업, 수산업 등을 영위하였으나 점차 제당, 화섬, 화학분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주)삼양사는 1963년 12월 삼양모방(주)을 설립한 데 이어, 1969년 12월 전주에 폴리에스터공장을 준공하며 화섬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SK케미칼(주)은 1969년에 (주)선경화섬에서 독립하여 세워진 기업이다. (주)선경화섬은 1960년대 들어 폴리에스터로
만든 야외복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화섬시장을 주도하고자 1966년 창립했다. 1968년에는 수원에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터를 생산하는 공장을 동시에 건설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폴리에스터 부문을 분리해 설립한 기업이 바로
(주)선경합섬이다.
창립 이후 (주)선경합섬은 섬유산업의 호황에 힘입어 선경그룹(지금의 SK그룹)의 핵심 계열사이자 업계 선두기업으로
부상했다. 1973년에는 모기업인 (주)선경화섬을 흡수합병하고 제약업에도 진출하는 등 빠르게 사세를 확장해나갔다.
사업규모가 커짐에 따라 1988년에는 (주)선경인더스트리로, 1998년에는 SK케미칼(주)로 사명을 변경하며 화섬시장을
선도했다.
이처럼 국내 화섬산업의 태동기에 출범한 (주)삼양사와 SK케미칼(주)은 국내 화섬시장의 성장을 이끌며, 화섬산업이
국가경제 발전에 큰 축을 담당하는 산업으로 자리 잡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1999년을 기준으로 SK케미칼(주)과
(주)삼양사는 국내 화학섬유 분야에서 각각 1,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삼양사와 SK케미칼(주)을 필두로 19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가도를 달려온 국내 화섬산업은 1990년대 후반
들어 큰 위기를 맞았다. 미래시장을 낙관한 기업들이 너도나도 이 분야에 뛰어들어 14개 업체가 난립하는 가운데,
과다한 설비 증설로 공급과잉 상태가 되면서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1994년, 화섬업계의 하루 2,338톤이던 장섬유, 즉 PFY(Polyester Filament Yarn, 폴리에스터 필라멘트사) 생산능력은 1999년 4,340톤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단섬유 역시 같은 기간 1,385톤에서 2,460톤으로 급증했다.
더욱이 원료가격은 상승하는 데 반해 판매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해 수익성이 크게 악화되었고, 새로운 공급기지로
급부상한 중국 및 타이완, 동남아지역 신생업체들의 저가 공세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보니 업체들 간의 출혈경쟁도 극에 달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의 영향까지 겹쳐 화섬업계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몰리며 심각한 적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러한 시장상황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어서 단기간에 개선될 여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언론에서도 “화섬업계의 정상경영이 불가능하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결국 외환위기 상황이던 1998년 10월 이후 불과 8개월여 만에 14개 화섬업체 가운데 5개 업체가 파산하거나 워크아웃에 돌입하는 등 화섬업계는 급격한 침체에 빠져들었다. 살아남은 업체들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어 자구책 마련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국내 화섬산업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주)삼양사와 SK케미칼(주)도 화섬사업 부문의 적자가 지속되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외환위기 상황이어서 거의 모든 산업이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화섬산업은 공급과잉과 열악한 시장환경이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다른 분야의 산업들보다도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화섬시장의 구조적인 불황이 지속되자 (주)삼양사와 SK케미칼(주)은 당시 정부가 주도하여 정책적으로 추진한 사업구조조정과는 별개로 민간 차원의 자발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성장잠재력이 큰 사업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혁신하여 사업역량을 강화하고 국제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복안이었다.
(주)삼양사는 식품‧사료 및 의약‧바이오 분야를 집중 육성하여 미래형 첨단사업구조로 전환하기로 했다. SK케미칼(주) 역시 섬유 중심의 사업구조를 화학수지‧정밀‧생명과학 중심으로 전환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 과정에서 두 회사는 섬유사업의 국제경쟁력을 회복하고 미래성장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화섬 사업을 분리·통합해 독립된 전문기업을 설립하기로 했다. 양사의 사업부문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화섬사업을 분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한 상황이었다. 두 회사가 섬유사업 통합을 구상하게 된 것은 통합에 따른 장점이 그만큼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두 회사 모두 장섬유와 단섬유 사업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상품구조와 판매전략 측면에서 각자 차별화 전략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인 요소가 많았다. 설비 측면에서도 (주)삼양사의 단섬유 라인은 80톤 이상의 대형이고 SK케미칼(주)은 30톤 위주의 소형으로 구성돼 있어 (주)삼양사는 규모의 경제를 SK케미칼(주)은 다품종 소량 생산이 가능해 통합의 시너지가 매우 클 것으로 판단되었다. 장섬유의 경우에는 (주)삼양사는 복합방사 부분에 SK케미칼(주)은 복합사 부분에 강점을 가지고 있어 여러모로 통합 시 긍정적인 요소가 많았다.
따라서 두 회사의 사업을 통합하면 당장 700억 원 정도의 시너지효과가 날 것으로 분석되었다. 또한 생산라인 통합으로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면, 생산원가를 절감하고 인력운용의 효율화를 기함은 물론 연구개발과 판매부문의 역량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마침 두 회사는 생산 및 판매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굳건한 신뢰관계를 구축해 왔고 전통 있는 기업으로서 유사한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어, 기업합병 시에 흔히 나타나는 문화적 충격도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주)삼양사와 SK케미칼(주)은 1999년 10월 무렵부터 논의를 진행하여, 2000년 6월 두 회사의 화섬사업을 통합한 법인을 새로 설립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연산 60만 톤의 폴리에스터 섬유 생산규모를 갖춘 세계 5위권의 글로벌기업, 경상이익률 5%, 부채비율 150%의 건실한 재무구조와 차별화 경쟁력을 갖춘 우량기업을 만들겠다는 게 두 회사의 목표였다. 그리하여 국내시장은 물론 글로벌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겠다는 복안이었다.
(주)삼양사와 SK케미칼(주)은 2000년 7월 통합법인 설립 계획을 공식 발표하고, 곧바로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통합추진위원회는 사업통합을 위한 세부절차를 진행하는 동시에 신설법인의 사명을 <(주)휴비스(HUVIS)>로 결정해 공포했다. 휴비스는 ‘Human’과 ‘Vision’을 결합해 네이밍한 것으로, 인간중심의 경영과 미래지향의 경영을 표방하는 창업정신이 반영된 이름이다.
휴비스의 자본금은 2,500억 원으로, (주)삼양사와 SK케미칼(주)이 50대50의 동등한 지분으로 출자하기로 했다. 자산은
7,000억 원 규모이며, 본사는 서울 가락동의 10층 건물을 매입해 마련했다. 생산설비는 두 회사의 것을 그대로 이전해왔다. 이에 따라 휴비스는 전주, 수원, 울산 등지에 3개의 공장을 가동하며, PET 장섬유는 연간 23만 1,000톤(국내 2위), PET 단섬유는 연간 39만 2,000톤(국내 1위)의 생산능력을 갖춘 기업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휴비스는 2000년 11월 1일 정식으로 출범하여 업무를 시작했다. 초대 대표이사 사장에는 그동안 통합추진위원장을
맡아 통합작업을 진두지휘해 왔던 조민호 SK케미칼(주) 사장이 취임했다. 11월 21일에는 서울 광장동의 워커힐호텔에서 손길승 SK그룹 회장, 최태원 SK(주) 회장, 김윤 (주)삼양사 부회장과 임직원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기념식을 갖고 통합법인의 출범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휴비스의 출범 소식이 전해지자 업계 안팎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장섬유 15.1%, 단섬유 45.9%의 시장점유율을 가진
국내 최대의 화섬업체가 탄생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위기에 빠진 화섬업계에 처음으로 자율적인 구조조정에
의한 통합법인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주목을 받은 것이다.
언론에서도 휴비스가 파탄 상태에 이른 화섬산업을 회생시킬 계기가 될지 큰 관심을 나타냈다. 통합법인 휴비스의
경영이 성공할지도 관심이었지만, 특히 휴비스가 화섬업계의 구조조정을 촉진하고, 나아가 외환위기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국내 산업에 자율적인 구조조정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지 궁금해 했다.
그것은 출범과 동시에 휴비스가 안게 된 가장 큰 과제이기도 했다.
(주)삼양사와 SK케미칼(주) 두 회사의 화섬사업을 통합해 출범한 휴비스에게는 출범 초기부터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공급과잉과 과당경쟁으로 공멸(共滅) 위기에 처한 화섬산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글로벌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또 서로 다른 환경에서 근무하다 한 식구가 된 임직원을 하나로 통합하여 공동체로서의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것도 중요했다. 큰 틀에서 볼 때 이 두 가지가 해결돼야 통합의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에 휴비스는 2000년 11월 21일 열린 창립기념식에서 새 통합법인이 추구할 구체적인 사업방향을 제시했다. 2001년까지 매출 1조 1,642억 원, 경상이익 800억 원을 달성하고 2003년까지 당시 180%인 부채비율을 60%로 낮춘다는 포부도 밝혔다.
휴비스는 전사 차원에서 강력하게 변화와 혁신을 추진했다. 기존 사업을 폴리에스터 장섬유, 단섬유, 고상 칩(Chip) 등 3개 분야로 사업영역을 명확히 하고, (주)삼양사, SK케미칼(주) 두 회사가 운영하던 제품 포트폴리오를 상호보완적으로 재정비했다. 더불어 향후 고부가가치 신섬유와 스판덱스, 산업용 자재 등의 분야로 사업다각화를 추진한다는 방침도 분명히 했다.
연구개발 측면에서는 R&D부문을 통합해 공동연구를 강화함으로써 중복투자를 최소화하고 연구효율을 높이도록
했다. 마케팅 역시 조직과 전략을 재정비하여 시너지가 나도록 조정했다. 해외에서 열리는 각종 박람회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해외영업망도 확충하는 등 해외시장 개척에도 힘을 쏟았다.
2001년 5월 휴비스는 그동안 추진해온 사업목표와 전략 등을 정리하여, 2005년을 목표시점으로 하는 <비전 2005>를 선포했다. 새 비전에는 ‘기업가치 3조 원의 폴리에스터 산업의 글로벌 리더’를 미래비전으로 명문화하고, ①휴비스인을 통합하는 하나의 문화, ②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두 가지 기반, ③비전 달성을 위한 세 가지 핵심전략을 담았다.
휴비스는 창립 당시는 물론 <비전 2005>에서도 사업적 통합 못지않게 문화적 통합을 중시했다. 인력과 조직의 화학적인 통합과 노사 간의 신뢰 구축이 사업 성공의 기반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인식에 따라 휴비스는 창립 직후인 2000년 12월 5일 사보 <휴비스 투게더>를 창간해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고, 2001년 10월 ‘제1회 노사화합체육대회’를 시작으로 일체감 조성을 위한 행사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CEO를 비롯한 경영진이 사원들과 소통하는 간담회와 설명회를 수시로 열어 경영정보를 폭넓게 공유하기도 했다.
2002년 3월, 직급체계를 통일한데 이어 2003년, 업무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전산시스템인 통합생산관리시스템(MES)과 경영정보시스템(EIS) 구축을 완료하였다.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문화를 내재화하도록 한 것이다. 평가시스템을 합리적으로 구축하고 성과보상제도를 도입해 사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촉진하는 노력도 병행했다.
당시 휴비스가 가장 공을 들인 분야 가운데 하나는 노사관계이다. 휴비스는 두 회사의 사업을 분리해 통합한 회사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1사 2노조(수원공장, 전주공장)’ 체제였다. 더구나 나라 전체에 구조조정 바람이 거세게 불던 시기여서 자칫 이른바 노노갈등이나 노사분규가 빈발할 수도 있는 여건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사 합의로 인원감축 없는 구조조정을 이루어내고, 노동조합도 회사의 성과 창출을 위해 적극 협력하고 헌신함으로써 노사가 상생하는 ‘분규 없는 사업장’의 전통을 만들었다.
덕분에 휴비스는 폴리에스터 섬유시장의 경영환경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조직 전반에서 문화적
통합을 이루어냄으로써, 오로지 경영성과 창출에 전 임직원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게 되었다.
휴비스의 임직원들은 통합법인 출범 직후부터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고 회상한다. 그만큼 ‘성공’의 의지가 강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덕분에 휴비스는 업계 관계자들과 경제전문가들의 반신반의 속에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창립 첫 해부터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나타냈다. 2001년에 9,490억 원의 매출과 541억 원의 영업이익을 실현하더니, 2002년에도 9,534억 원의 매출과 591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두어들였다.
같은 기간 순이익도 각각 184억 원, 281억 원을 기록했다. 통합법인 출범 직전까지 (주)삼양사와 SK케미칼(주) 두 회사가 화섬사업에서 연간 500억~600억 원 규모의 적자를 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불과 1년 만에 만들어낸 성적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반전이었다.
이같은 성과는 ‘통합 시너지’를 창출하겠다는 일념으로 정교한 사업전략을 마련하여 과감하게 추진하고, 상생의 노사화합 정신에 기반을 두고 조직문화의 화학적 통합을 이루어낸 덕분이었다.
휴비스의 성공은 화섬업계는 물론 한국경제 전반에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경쟁력만 갖춘다면 화섬산업도 얼마든지
부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준 것이다. 나아가 민간 차원에서 추진하는 자율적인 구조조정의 성공모델을 제시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인 방향으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도록 측면지원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이에 따라 휴비스는 출범 1년 만에 한국 화섬산업을 대표하는 리딩 컴퍼니로서의 위상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게 되었다.
휴비스는 두 회사의 역량을 한데 모아 탄생한 회사인 만큼, 결집된 힘으로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하고 침체한 섬유산업의 부활을 선도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조민호 사장도 수시로 “지금의 기업가치는 높지 않지만, 수년 안에 최소 3조 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회사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러한 포부를 펼치기에는 당시 화섬시장의 여건이 녹록치 않았다. 섬유업계의 구조조정이 진통을 거듭하는
가운데, 원자재 가격은 치솟고 중국이 한국산 제품에 대해 반덤핑 판정을 내리는 등 내우외환이 계속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휴비스는 국제경쟁력을 강화하여 지속적인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기술중심기업’으로 진화하기로 했다. R&D 기능을 대폭 강화해 고도의 기술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동남아 등지의 후발업체들과 차별화하는 제품경쟁력을 발휘하여 글로벌시장에서 확고한 경쟁우위를 차지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의류용 소재의 비중을 줄이고 수익성이 뛰어난 산업용 섬유제품의 개발에 주력하여 ‘차별화 섬유회사’로 변화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같은 방침에 따라 휴비스는 2001년 8월, 기존 전주공장에 위치한 <제1연구소> 외에 수원공장 내에 <제2연구소>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오영수 소장을 비롯한 6명의 연구원이 참여한 태스크포스 팀으로 출발했지만, 9월 들어 15명의 정예요원을 추가로 선발하고 곧이어 외부에서 전문인력을 대거 보강해 명실상부한 연구소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제1연구소는 기존 제품의 품질과 공정 개선을, 제2연구소는 건축재, 자동차 내장재 등 고분자화합물의 연구개발을 담당하게 되었다.
2002년 8월 27일에는 그동안 각 사업단위별로 운영돼오던 대고객 서비스 조직을 통합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 22명으로 구성된 CRM그룹을 신설했다. CRM그룹은 국내외 원사 고객들을 대상으로 상품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판매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에 걸쳐 기술 및 마케팅을 지원하는 전담조직이다. 이 조직은 고객서비스와 상품개발을 상호 연계하며 고객과의 상생을 추구하는 신개념 조직으로, 제품의 품질개선, 신제품 개발, 마케팅 전략 수립 등의 업무에 고객의 참여를 제도화했다는 특징이 있다.
휴비스가 기술경쟁력 강화에 힘을 쏟는 동안에도 화섬업계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오히려 공급과잉과 수익성 악화로 인한 어려움은 더욱 더 가중되는 양상이었다. 이 때문에 화섬업계는 핵심사업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펼치며 생존전략 마련에 고심해야 했다.
정부도 섬유사업의 회생을 지원하기 위해 2002년 8월, 우리나라를 세계 3대 섬유강국으로 성장시키겠다는 내용의 ‘2010년 섬유 발전전략’을 수립해 발표했다. 하지만 전체 섬유산업의 위기를 돌파할 뾰족한 대안은 없는 실정이었다.
휴비스는 ‘2005년 기업가치 3조 원의 폴리에스터 글로벌 리더’로 성장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품질개선과 일류상품 개발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것이 현재의 생존과 미래의 성장을 담보하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본 것이다.
그 일환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용 섬유를 포함해 비의류용 섬유소재 등을 차세대 주력제품으로 집중 육성하기로 했다. 건축용 내장재나 단열재 소재의 생산을 더욱 늘리고, 자동차 내장재와 인공피혁 개발에도 적극 나서기로 했다. 비의류용 섬유제품의 비중을 2005년까지 8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구체적인 수치도 제시했다. 신기술‧신제품 개발에 전사적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수익성이 높고 경쟁력 있는 차별화 제품 개발을 위해 휴비스는 R&D 기능을 더욱 더 강화하기로 하고, 2004년 1월 제1연구소와 제2연구소를 통합해 단일 연구소 체제로 전환했다. R&D 자원을 집중화하여 연구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이겠다는 복안이었다.
연구소에는 FY그룹, 전략R&D그룹, 그리고 연구소장 직속의 SF팀을 두었다. 그리고 FY그룹에 CRM팀, FY방사팀, FY사가공팀을, 전략R&D그룹에 Polymer팀, 탐색팀을 두어 각 분야별로 저마다의 전문성을 발휘하도록 했다.
그 해 11월 10일에는 대전광역시 대덕지구에 새로운 연구단지를 준공하고, 전주, 수원 등지에 흩어져 있던 R&D 자원을 모두 이전해 한 장소로 집결시켰다. 조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통합하여 단일 연구소의 면모를 갖추겠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휴비스는 이 통합 연구소를 <휴비스 R&D센터>로 명명하고 50여 명의 전문 연구인력을 배치했다. 또 폴리머 중합에서 염색가공에 이르는 전 공정에 대한 일관 Pilot 설비 체제를 갖추는 등 첨단 연구개발 설비를 대거 구비했다.
이에 따라 R&D센터는 연구개발의 완성도를 높이고 개발기간도 크게 단축하여 시장을 선도할 신제품 개발에 주력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폴리에스터 섬유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산업 분야와의 융복합을 통한 신소재 분야로 연구영역을 확장하여 고부가 제품 중심의 사업구조를 구축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휴비스는 창립 초기부터 기술경쟁력을 높이고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는 세계시장에서 지속적으로 경쟁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차별화섬유 제품의 사업비중을 높여야 하는데, 그러자면 그만큼의 기술력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많은 결실을 가져왔다. 2001년 9월, 산업자원부의 기술개발자금을 지원받아 한양대학교와 공동으로 세계 최고 속도의 ‘폴리에스터 초고속 방사기술’을 개발한 것이 대표적이다. 방사기술이란 석유화학원료인 TPA(테레프탈산)와 EG(에틸렌글리콜)에서 실을 뽑아내는 기술을 말한다. 휴비스는 분당 3,200m였던 기존 폴리에스터 POY 방사 속도를 분당 5,000m로, 4,000~4,500m였던 FDY 방사속도를 6,500m로 높여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그 해 10월에는 항균 및 방취, 자외선 차단기능이 있는 <미라웨이브(Mirawave)>와 흡수력과 건조성이 뛰어난 고기능성 폴리에스터 섬유인 <쿨에버(Coolever)>를 출시했다.
미라웨이브는 인체 유해균을 막는 피부친화적인 소재로 침구류, 의료용 침대시트, 환자복 및 각종 니트웨어 소재로 활용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웰빙시대의 다기능 차별화 소재로 관심을 모았다.
쿨에버는 땀을 빠르게 흡수하여 항상 쾌적한 상태를 유지해주는 소재로, 각종 스포츠웨어와 언더웨어 등 고기능성 의류에 적합하다. 특수 십자단면에 있는 4개의 모세관을 통해 피부로부터 땀을 빠르게 흡수한다. 일반 섬유보다 30% 이상 넓은 표면적을 이용해 땀을 빠르게 배출해 건조시키고, 외부 공기를 유입함으로써 쾌적함을 제공하는 다채널 흡습속건성 소재이다.
또한 2002년에는 듀폰과 손잡고 PTT(폴리트리메틸렌 테레프탈레이트) 원사 <에스폴(Espol)>을 개발하여 전략제품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PTT 원사는 기존의 폴리에스터, 나일론, 아크릴 등과 경쟁할 미래의 섬유로 평가받는데, 당시만 해도 잠재시장의 규모가 2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에스폴은 실크와 비슷한 촉감을 가지면서도 특수가공을 하면 울(wool)과 같은 감촉을 내는 특징이 있어 각광을 받았다.
2004년 들어 휴비스는 원사에 특수 항균제를 입혀 반영구적인 항균성을 갖춘 항균 쾌적섬유 ‘미라웨이브 쿨(Mirawave cool)’을 출시했다. 이 제품은 인체의 면역기능을 강화하고 땀 냄새나 악취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어, 침구나 유아용 완구, 스포츠 의류용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JTETC(일본 섬유평가 기준위원회)로부터 SEK(항균인증마크)를 획득하기도 했다.
휴비스의 기술경쟁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세계일류상품’이다. 세계일류상품이란 생산기업의 경쟁력 제고 및 수출품목의 다양화와 고급화, 미래 수출동력 확보를 위해 지식경제부와 한국생산성본부가 시행하는 사업이다. 세계시장 점유율 5위 이내에 들면서 세계시장 규모가 연간 5,000만 달러 이상이거나 수출규모가 연간 500만 달러 이상인 ‘세계일류상품’과 향후 5년 내에 5위 안에 들 가능성이 높은 ‘차세대 일류상품‘으로 나눠 매년 선정한다.
2001년 11월 첫 시행된 이 사업에서 저융점사로도 불리는 휴비스의 <로멜팅 화이버(LMF, Low Melting Fiber)>가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일반 폴리에스터 섬유가 280℃ 이상의 고온에서 녹는 데 반해 로멜팅 화이버는 100~200℃의 낮은 온도에서 녹는 섬유이다. 이같은 특성을 활용해 인체에 유해한 화학 접착제를 대체하는 최적의 접착용 소재로 활용이 가능하다. 낮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열과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적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이라 할 수 있다.
로멜팅 화이버는 1989년 (주)삼양사 시절 개발에 성공한 신소재로, 패딩점퍼에 처음 적용되었다. 그 후 휴비스는 다양한 분야로 로멜팅 화이버의 적용범위를 확대해 자동차 등 산업용 소재로 공급했다.
시장에서 수요가 급증하자 1997년 본격적으로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칩 제작 후 다시 칩을 녹여 생산하는 배치(batch)라인 생산 방식에서 칩 공정 없이 중합에서 방사까지 대량으로 이어지는 연중(CP) 공정을 추가하여 하루 30톤의 생산량을 2배 이상 확대하였다. 그 결과 2000년대 들어서는 세계시장의 40%를 점유할 만큼 큰 인기를 모았다. 2020년 현재까지도 세계 80여 개 나라에 수출되는 글로벌 1위 소재이다.
2004년 12월에는 잠재권축성 스트레치 원사(SSY/Fisto)가 휴비스의 두 번째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되었다.
기존 신축 장섬유는 스판덱스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폴리에스터에 신축성에 부여한 국내 최초 섬유였다. 2종의 다른 폴리머 물성 차이로 자연스럽게 스프링 구조를 갖게 되어 신축성을 발현하는 데 처음 개발 당시에는 2가지 물질의 조합을 찾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다양한 연신 조건의 테스트와 수축율을 개선하기 위한 공정을 구축하고 고온의 열 세팅이 가능하도록 설비를 개조하는 등 치열한 노력을 통해 품질 확보가 가능해졌고 시장에 출시된 폴리에스터 스트레치 원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객의 니즈(needs)를 반영하여 힘있는 신축성을 원하는 곳에는 SSY 신축사를 소프트한 신축성을 원하는 고객에게는 Fisto를 공급하여 제품을 다각화하고 최근에는 터치감을 향상시킨 CEY를 개발하여 판매를 확대하고 있다.
휴비스는 창립 초기부터 기술개발과 함께 글로벌화(Globalization)에 큰 비중을 두었다. 비전 2005를 실현하고
새로운 성장기회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구조적으로 한계상황에 다다른 국내시장을 뛰어넘어 해외시장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해외사업을 성공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휴비스는 수요가 크게 늘고 있는 중국을 비롯해 남미, 동유럽 등 세계 각지에
마케팅 및 생산 거점을 확보하고, 휴비스가 중심이 되는 범세계적 생산․판매․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로 했다.
휴비스는 먼저 중국시장에 주목했다. 당시 중국은 세계 1위의 화섬 수요국으로, 국내 화섬업계가 생산물량의 50%
이상을 수출하는 나라였다. 더구나 WTO 가입을 계기로 시장을 광범위하게 개방하는 중이어서, 중국시장에 직접
진출한다면 세계 각국의 블록화 경향과 비관세 장벽을 뛰어넘어 해외사업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같은 관점에서 휴비스는 가장 먼저 중국 현지에 생산거점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리고 2001년 12월 중국 쓰촨성
(泗川省)의 쓰촨폴리에스터공사와 손잡고 쯔궁(自貢)시에 현지법인 <사천휴비스화섬유한공사>를 설립했다.
합작법인의 지분은 휴비스가 95%, 쓰촨공사가 5%를 보유하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 진출하는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은 물류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동부 연안에 공장을 설립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휴비스는 중국 서부 내륙지역이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쓰촨성을 선택했다. 또한 중국 정부의 서부대개발 정책이 시작되는 시점이라 향후의 성장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입지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사천휴비스화섬유한공사는 2003년 1월 연산 단섬유 15만 톤 규모의 폴리에스터 생산공장 건설에 착수해 2004년 9월 준공, 2004년 10월부터 상업생산을 시작하였다. 사업비로는 6,000만 달러가 투입되었다. 이에 따라 휴비스는 연산 40만 톤 규모인 국내 생산능력을 합쳐 총 연산 55만 톤의 생산능력을 확보함으로써 세계 1위의 단섬유 생산업체로 부상했다.
사천휴비스화섬유한공사는 중국시장을 제2의 내수시장으로 만든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휴비스가 추구하는 글로벌경영의 전초기지로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휴비스의 글로벌경영은 한층 더 속도를 내게 되었다.
중국 서부지역에 사천휴비스화섬유한공사의 폴리에스터 생산공장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휴비스는 동부지역에 대한 투자도 단행했다.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시의 직물공업단지 부근에 염색공장을 설립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내 섬유업체가 해외에 염색공장을 운영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도 휴비스가 중국 현지에서 직접 염가공사업에 나서기로 한 것은, 국내에서 생산된 폴리에스터 장섬유를 단순히 수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지 시장의 니즈(needs)를 반영한 염색공정까지 일괄 처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를 통해 실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현지 수요업체들의 만족도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휴비스는 중국의 유수한 폴리에스터 섬유 전문업체인 영성그룹 계열의 직물업체, 영성화섬과 제휴하여 2003년 8월, 염가공 합작법인 <항주휴비스염정유한공사>를 설립했다. 23억 원의 사업비를 투자한 휴비스는 35%의 지분을 확보하고, (주)삼양사 계열의 염색업체인 (주)삼양텍스로부터 라인설비 등 공장운영에 관한 노하우를 전수받아 경영에 참여했다.
이어 2004년 4월에는 영성그룹과 제휴하여 사가공 법인 <항주휴비스영성화섬유한공사>를 합작 설립했다. 이 합작사업에 휴비스는 35억 원을 투자해 70%의 지분을 확보하고 영성그룹과 공동경영을 시작했다.
항저우에 항주휴비스염정유한공사와 항주휴비스영성화섬유한공사를 설립함으로써 휴비스는 중국 동부지역에 대한 현지 공급망을 한층 강화하고 중국시장 공략에 더욱 속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그 이후 항주휴비스영성화섬유한공사는 매년 지속적으로 높은 수익을 실현하며 휴비스의 중국사업에 청신호를 밝혀주었다.
휴비스는 중국을 중심으로 생산거점을 구축하는 한편으로 글로벌기업들과의 전략적 제휴에도 속도를 더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세계적인 화학업체 듀폰(Dupont)과의 제휴를 성사시켰다는 점이다.
휴비스는 2002년 무렵부터 듀폰과의 제휴 방안에 대한 협의를 시작해 2003년 5월 듀폰 계열의 섬유업체 DTI(DuPont Textiles & Interiors)와 마케팅 및 기술 분야에서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듀폰 DTI의 ‘쿨맥스’, ‘라이크라’, ‘택켈’ 등 첨단섬유소재와 폴리에스터 장섬유 제품을 휴비스가 OEM(주문자상표 부착) 방식으로 생산해 공급하고, 휴비스의 기능성 섬유 에스폴 등 주력제품을 듀폰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마케팅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두 회사가 보유한 제품과 기술을 바탕으로 신제품을 공동개발하여, 생산은 휴비스에서, 판매는 듀폰에서 담당하는 새로운 형태의 협력관계도 구축해나가기로 했다. 휴비스의 제품을 듀폰이 구매하여 재판매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휴비스는 연간 3만 톤 이상의 생산유발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듀폰의 선진 기술과 경영노하우를 도입하는 동시에, 글로벌시장에서 휴비스 브랜드의 위상도 크게 높일 수 있게 되었다.
두 회사가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은 것은, 급변하는 시장상황에서 서로의 이해와 요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듀폰은 섬유사업부문의 전문화 및 일관화를 추진하기로 하고 2002년 2월 섬유사업을 분리해 DTI를 설립했다. 그리고 DTI의 발전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기술제휴 및 공동마케팅을 펼칠 파트너를 모색해 왔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가장 큰 폴리에스터 생산자이자 폴리에스터 테크놀로지 분야에 강점을 지닌 휴비스를 최적의 파트너로 결정했다.
휴비스 역시 비전 2005 실현을 위해 글로벌경영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따라서 듀폰이 요구하는 제품을 공급하고 듀폰의 기술과 브랜드 파워를 활용하여 북미와 유럽 등 해외시장에서 마케팅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제휴관계를 맺은 두 회사는 그 이후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의 범위를 넓히며 공동발전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2000. 11 ~ 2006. 07 1대 조민호 사장
화섬업계의 상생을 위해 통 큰 결단을 내린 SK케미칼㈜와 ㈜삼양사는 매킨지에 의뢰해 1년간 모의시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통합의 시너지는 상당할 것으로 예측됐다. 특히 미래경쟁력이 있다는 예측은 장기적 관점에서 통합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가 크다는 것에 양사의 이견이 없었다.
통합 과정이 조금이라도 소문나면 직원들의 동요는 물론 대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부 담당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내용을 비밀에 부쳤습니다.지난한 과정을 거쳐 양 사의 의견이 완벽히 일치되고, 휴비스는 화섬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등장했다. 통합법인 휴비스호의 첫 번째 키는 조민호 초대 사장에게 쥐어졌다.
휴비스 설립 후 물리적 화합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규모가 큰 두 회사를 합치니 직원 수가 3,000명에 달했어요. 게다가 서로 용어도, 문화도 달랐죠. 이런 대규모의 조직을 이끌기 위해서는 열정과 카리스마가 필요했습니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힘들었을 수 있어요. 다른 문화가 만나 갈등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다소 벅찬 일정과 정책에도 직원들이 잘 따라와 주었습니다.다소 힘에 부친 요구에도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통합 이후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던 조민호 초대 사장. 서로 다른 생각이 부딪혀도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린다면 언젠간 한 곳에서 만나게 될 것 이라는 그의 말에는 결과가 말해준 당찬 확신이 있었다. 조 사장은 회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장섬유(FY) 사업 부문의 수익성을 개선하는 것이 첫 번째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대다수가 반대한 수원공장의 STOP을 결정하고 실행하였다.